내 기억을 더듬어 볼때 1972년이나 1973년 정도이다.
신림중학교 2학년때 기형도와 같은 반에 편성되어 함께 학교생활을 하였고,
작가 이어령의 제자였던 국어선생님을 담이셨더 그 시절에 이중섭을 처음 만났다.
국어선생이셨던 담임덕에,
당시의 중2 학생의 시어의 경계를 넘나들던 형도의 글쓰는 재주와
그럭저럭 삽화등에 재미를 붙여했던 내가 맡은 '교내시화전'을 기점으로 형도와는 학교생활온종일을 붙어 살계하는 계기가 되었던 그때의 일이었다.
당시 이중섭의 그림이 세상에, 대중에 알려지면서 그의 작품을 보고 난 충격은 내게 엄청난 파도였다.
중2때부터 중학교생활 내내 일주일에 몇통씩의 우편엽서에 시와 삽화를 그려 형도와 나누던 계기도 이중섭이었다.
형도와 나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나누던 교감은 우편엽서에 시.수필과 생각들을 나눈것이 중섭이 그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혀한 엽서화가 많은 계기가 되었던 부분이다.
(당시 중2시절에 형도가 구사하던 언어와 표현은 늘 내가 계속해서 그에게 엽서를 보내게 하는 원인이었다)
내 좋아하는 화가중의 화가다. (늘 중섭의 그림과 고흐의 그림들이 뇌 한편에 각인된 것 같은 느낌이다.)
- 이중섭 연보 -
1916년 (평안남도 평원) - 1956년 9월 6일
1941년 미술창작 작가협회전
1952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 단원
1950 원산 신미술가협회 회장
1946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
1946 북조선 미술동맹 회원
1942 미술창작 작가협회 회원
1939 자유미술협회 회원
1931 ~ 도쿄문화학원 미술과
오산고등보통학교
평양종로공립보통학교
[수상]
1978 은관 문화훈장
1937 자유미협전 태양상
[연보]
대향(大郷 /素塔) 이중섭(李仲燮 1916 ~ 1956)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지주의 3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중섭의 미술에 대한 재능은 어렸을 때부터 그 조짐을 보였다. 게다가 외탁으로 자랐던 그는 공립보통학교를 서울 종로에서 다니게 되어 혼자 사색할 시간이 많았으며 내성적인 성격의 이중섭은 학과 공부보다 그림에 더 매달렸고, 그로 인해 원래 진학을 목표로 하였던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낙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평양고등보통학교 대신 오산학교에 입학했던 이중섭은 미술담당 교사였던 임용련을 만나게 된다. 미국 예일대에서 미술공부를 했고, 파리에서 활동했던 임용련은 당시 대부분 작가의 유학지가 일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드문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습작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이에 영향을 받아 습작을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가 다수의 드로잉을 남겼던 이규가 이 때문이다. 또한 이중섭의 유년기였던 1920년대 우리 미술계에는 유화작가(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이 속속 등장해 근대화의 시동을 걸었던 시기다.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임용련 선생과의 만남, 그리고 근대 화단의 형성 과정을 직접 몸으로 겪였던 이중섭은 자신의 경험이 이후의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중섭의 본격적인 미술공부는 1935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제국미술학교는 도쿄미술학교와 더불어 일제 치하 많은 한국인 유학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곧 이중섭은 제국미술학교를 그만두고 분카가쿠엔(文化學校) 미술과로 옮기게 된다. 이는 제국미술학교보다 분카가쿠엔이 당시 일본 미술계에 유입되던 전위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분카가쿠엔에서의 이중섭은 강렬한 야수파의 조형성을 선보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자유롭고 강렬한 선모력으로 대표되는 이중섭의 조형세계가 열렸던 때이다. 더불어 이중섭은 이곳에서 훗날 부인이 될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한국명 이남덕)를 만나게 된다.
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렀던 1944년 이중섭은 학교를 졸업하고 연인 마사코를 일본에 둔 채 원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에 마사코가 한국으로 왔으며 둘은 혼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1946년 첫 아이가 태어났지만 곧 디프테리아로 잃고 만다. 당시 제대로 된 직업없이 작품제작과 전람회 출품에 몰두하던 이중섭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이를 계기로 죽은 첫 아이를 모티프로한 ‘하얀 별을 나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1947년 [해방기념전람회]에 출품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중섭은 한국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국을 전전하는 생활로 빠져들게 된다. 첫째 태현(1947)과 둘째 태성(1949)이 태어났고 피난을 위해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전세의 위급함을 느끼고 다시 제주로 피난하게 된다. 1952년 생활고를 못이기던 마사코는 결국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게 된다. 그후 이중섭은 1953년 도쿄에서 단 5일의 해후를 끝으로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이별의 아픔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중섭 필생의 걸작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1954년까지 통영에 머물렀던 그는 [소]연작과 [부부]등 한국미술의 대표작을 쏟아냈다. 이후 진주, 서울, 대구 등지를 전전하며너 전람회 출품작에 몰두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래던 이중섭은 1956년 9월 6일 간장염으로 서울 적십자 병원에서 타계했다.
이중섭 전시는 타계 이듬해 <유작전>을 시작으로 1970년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특히 1972년 현대화랑의 15주기 기념전은 [이중섭 작품집]도판이 출간되어 이중섭을 대중에게 알리는 큰 기여를 한 전시로 꼽힌다. 또한 1979년 미도파 백화점(현 명동 롯데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전시에는 이중섭이 부인 마사코에게 구의 마음과 가장으로서 그리운 마음을 담은 엽서화와 은지화등 200여점의 작품이 공개되었다. 이중섭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1986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30주기 회고전에서 19여만명의 관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껄끄러운 일이나 이중섭과 관련한 위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작가중 이중섭만큼 위작 논란에 자주 휘말린 작가도 없다. 왜 그럴까 ? 이중섭은 한정된 소재를 반복적으로 사용했고, 강렬하고 최소한의 선의 표현으로 형태를 구축했기 대문이다. 더불어 이중섭의 작품이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터진 이중섭 위작 사건은 가족이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이중섭은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도 내용은 다르지만 똑 같은 그림을 각각 보낼 정도로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는데 말이다. 또한 이중섭의 드로잉 3000여점을 소장하고 있었다던 고서적 전문 수집가의 소장품 전부도 법원에 의해 가짜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오해는 바로 작가에 대한 자료가 일천한 까닭이다. 광복과 전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미처 이런 부분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이중섭이 좀 더 화단에서 활동했더라면 이런 유감스런 일은 없었을까 ? 역사는 가정을 부정한다.